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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는 오키나와로 갔는가


삼별초는 오키나와로 갔는가
한겨레21 | 기사입력 2007-09-11 08:09 기사원문보기

[한겨레] 오키나와 기와에서 발견된 고려의 흔적, 삼별초의 멸망 기록에 의문 던져

▣ 제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삼별초. 800여 년 전 몽골제국에 끝까지 저항했던 고려의 무장 사병 집단. 국내 빨치산의 원조라고도 농처럼 이야기되는 이 사병 집단은 지금도 한국인에게 민족주의 전사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1260년 원나라의 압력에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려는 고려 조정에 맞서 그들은 남도의 진도로, 제주도로 옮겨가며 3년간 전투를 펼쳤다. 처절한 대몽골 항쟁을 거듭했지만, <고려사> 등의 사서는 배중손이 이끄는 진도의 삼별초군이 1년여 뒤인 1271년 쳐들어온 고려 정부군과 몽골 연합군에 진압됐고, 제주로 도망친 김통정의 잔여세력도 2년 뒤 소탕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말 기록대로 삼별초는 그 뒤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유난히 뜨거웠던 올여름 국립제주박물관(관장 손명조)에서는 기존 사서의 삼별초 멸망 기록에 정면으로 의문을 던지는 사료들이 발굴됐다.

“찾았어요. 같은 기와예요!”

“찾았어요. 연잎 무늬도 배치한 모양새도 똑같습니다. 같은 기와예요!”

지난 6월 초 어느 날 오키나와 해양유물 특별전 <탐라와 유구왕국>(7월17일~8월26일)을 준비하던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실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오연숙 학예사와 민병찬 학예실장은 눈앞에 나란히 놓은 수막새 기와 두쪽에 번갈아 눈길을 돌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오키나와에서 빌려온 출토품인 옛 기와 수막새가 이 박물관이 소장한 전남 진도 용장성 출토품인 13세기 고려시대 기와와 거의 똑같다는 사실을 막 확인한 것이다. 오키나와를 지배한 옛 유구(류큐)왕국의 수도 슈리성과 우라소에라는 곳에서 나온 기와들은 막새의 한가운데 둥근 씨방을 두고 주위로 아홉 개의 연꽃잎을 돋을새김하고 다시 바깥에 연속점무늬(연주문)로 테두리를 두른 고려계 기와였다. 용장성의 기와도 연꽃잎, 연주문 무늬 등의 배치가 똑같으나 다만 꽃잎 수가 여덟 개(팔엽연화문)로 하나 적을 뿐이다. 용장성? 삼별초가 고려 조정과 몽골제국과 항전하기 위해 진도에 쌓은 천혜의 요새다. 이곳의 건물터 기와가 왜 수천 리 푸른 바다를 건너 남쪽의 이국땅 섬 곳곳에서 무더기로 나온 것일까. 삼별초 군사들이 망망대해를 넘어 오키나와까지 흘러들어간 것인가?

민 실장은 지난 8월21일 특별전 기념강연을 한 일본 현지 학자 아사토 쓰쓰무(오키나와 현립예술대 교수)에게 앞서 이 사실을 귀띔했다. 용장성 기와를 본 아사토는 놀란 기색이 뚜렷했다. 오키나와에서 나온 수수께끼 고려계 기와들의 주인공은 13세기 삼별초 세력일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고 그는 단언했다는 게 박물관 쪽의 전언이다. 오키나와 기와와 모양이 비슷한 비교품을 찾으려고 소장품을 뒤졌다가 거둔 뜻밖의 수확이었다.

‘계유년 고려의 기와장인이 만들었다’

우리에겐 생소해도, 오키나와에서 출토된 700~800여 년 전의 고려계 기와들이 삼별초 세력의 것이라는 추정은 일본 학계에서 새삼스러운 가설은 아니다. 수십 년 전부터 오키나와 열도 곳곳에서 일본 본토, 중국계와 전혀 다른 문양과 형태를 지녔고 시기도 훨씬 앞서는 고려계 수막새, 암막새가 잇따라 성터 왕릉지에서 출토됐다. 현지 학자들은 수십 년째 이 기와를 만든 주체와 시기를 놓고 논란을 계속해왔다.


이 과정에서 가장 주목된 유물이 특별전에도 선보인 ‘계유년고려장인와장조’(癸酉年高麗匠人瓦匠造)란 글씨가 새겨진 암키와다. 사다리꼴 모양에 물고기 뼈대 모양 무늬가 함께 새겨진 이 대형 기와의 명문은 ‘계유년 고려의 기와장인이 만들었다’는 뜻이다. 옛 유구국 임금의 무덤 속 건물에 쓰였던 이 기와 명문에 고려 장인임을 떳떳이 알린 것으로 봐서 고려 장인의 정치적 지위와 긍지가 대단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계유년’의 구체적인 시기가 언제인지다. 고려 장인이 언제 오키나와에 진출했는지를 알려주는 징표가 되기 때문이다.

정황상 기와의 계유년에 맞출 수 있는 고려의 연대는 1153년, 1273년, 1333년, 1393년이다. 가장 유력한 것은 삼별초가 멸망한 1273년과 조선왕조 건국 직후인 1393년이다. 1273년설은 제주도에서 탈출한 삼별초 선단들이 상당수 오키나와에 표착해 세력을 형성했다는 추정이다. 제주도에서 해류를 타면 갈 수 있는 곳은 규슈와 오키나와 정도이기 때문이다. 정작 일본에서는 1393년설이 유력했다. <고려사>를 보면 오키나와의 첫 교류가 고려 우왕 때인 1389년 유구국 사절을 파견한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려 멸망 직전 공식 교류가 시작됐다고 봐야 하므로 양질의 고려 기와를 만드는 고급 기술자 파견은 이런 공식 교류 이후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고려 조정의 공식 기술자 파견이나 고려 멸망 뒤 상당수 유민이 정착하면서 생긴 결과물이라는 논지다.

하지만 진도 용장성 수막새 기와의 등장은 1273년설에 더 힘을 실어주게 됐다. 오키나와 출토 수막새가 용장성터의 것과 같은 반면, 중국이나 일본 본토계 기와에서는 이런 유형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삼별초 세력 일부가 곧장 진도에서 오키나와로 흘러들어갈 수 있을까. 동서로 1천km에 달하는 오키나와 열도는 제주도 남쪽으로 평균 780~800km나 떨어져 있다. 하지만 유속이 빠른 해류를 타면 보통 열흘에서 보름, 빠르면 일주일 안에 제주에서 오키나와에 도달한다고 한다. 나름대로 도항 준비를 치밀하게 한다면 상당히 많은 인원이 이동할 수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제주~류큐열도 사이 무수한 표류민 송환 기록이 실려 있고, 드물게 진도에 표류해온 유구국 사람들을 중국으로 보내 현지 유구국 사절에 넘겼다는 기록도 전한다. 게다가 진도를 빠져나와 2년간 더 항전한 김통정의 잔여 세력이 항거했던 제주도 항파두리성은 여지껏 제대로 된 발굴이 이뤄진 적이 없다. 발굴 결과에 따라 제주에서도 오키나와의 고려계 기와가 나올 가능성은 있다.

한을 품고 제주에서 배를 탔을까

흥미로운 것은 삼별초가 역사에서 사라진 13세기부터 오키나와인들은 지역 세력가들이 구스쿠라는 큰 성을 쌓고 경쟁하면서 본격적인 국가체제를 형성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인구도 적은 조그만 섬에서 곳곳에 거성을 쌓고 경쟁했다는 점은 성 쌓는 기술인 축성술과 전쟁 기술에 능한 외부 세력의 조력 없이는 쉽지 않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삼별초의 오키나와 진출설은 그런 면에서 솔깃한 가설일 수 있으나, 손명조 관장이나 고려사 연구자인 윤용혁 공주대 교수 등은 이 설을 확증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오키나와에서는 다량의 고려청자 조각들도 출토되는데, 도식화한 장식과 탁한 빛깔을 보이는 청자들은 출토된 명문 기와의 시기보다 늦은 14세기 쇠퇴기 청자들이다.

또 하나는 ‘대천’(大天)이란 글자가 쓰인 다른 고려계 암수키와의 존재다. 이 기와는 오키나와는 물론 제주도의 제주목 관아터 등에서도 똑같은 것들이 나왔다. 제주목이 조선초의 시설임을 감안하면 시기를 14세기 말에서 15세기까지도 늦출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두 가지 연대에 출토 기와의 시기가 걸칠 수 있어 좀더 정밀한 고고, 문헌 검토가 필요한 셈이다. 경위야 어찌됐건 오키나와에서 삼별초의 흔적이 더욱 확실해진다면, 우리 역사에서는 극적인 엑소더스의 장면이 추가될 것이다. 삼별초 군사들은 몽골군의 압도적 전력에 숱한 동료와 처자를 잃고 분노와 한을 품고서 진도 혹은 제주 해안가에서 푸른 바다 너머로 배를 타고 갔을 법하다.

유구왕국의 역사 시대는 800여 년 전부터다. 7세기 중국의 <수서>에 유구가 조공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사서에 나오는 왕조의 정사는 13세기 이후부터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관건은 고려의 해양 교류사를 어떻게 동아시아 역사 틀에서 보느냐 하는 점이다. 학계 관계자들은 국내에 이런 화두를 연구할 전문인력이 거의 축적돼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기와 제작 기술, 삼별초 역사는 물론 당대 오키나와의 정치·경제·사회사도 차분히 섭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조언이다. 윤용혁 교수는 “삼별초가 갔나 안 갔나 식으로 단순히 민족주의적 화두로 접근하면 안 된다. 중세 동아시아 국제관계사의 맥락에서 고려와 오키나와의 교류관계를 결부해 보는 관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반도-오키나와 교류의 역사


1389년 고려에 조공바치며 첫 교류, 임진왜란 땐 조선 침략 도움 거절해

지금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오키나와 열도를 제주도와 비슷한 풍광을 지닌 레저관광지로 여긴다. 하지만 ‘류큐(유구)왕국’으로 불렸던 이곳은 한반도와 700년 이상 외교적 인연을 맺은 오랜 친구 나라였다.

<고려사>를 보면 첫 공식 교류는 1389년 유구국의 중산왕 찰도가 사신을 파견해 조공을 바치면서부터다. 이후 조선 말기까지 수십 차례 사절을 파견해 진귀한 물산을 바치고 표류자 등을 교환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조 3년(1457)부터 순조 32년(1831)까지 약 400년간 20여 차례의 표류 기록이 나온다.

명분상으로도 중국의 명과 청나라에 조선과 같이 조공했던 국가로서 유구국은 국제 외교 등급에서 우호적인 교린관계를 유지한 ‘적례국’으로 간주됐다. 그래서 표류해 들어온 상대 국민을 자기네 백성처럼 후대한 뒤 송환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거리는 떨어져 있어도 해류 때문에 표류자가 많았고, 숱한 표류자 송환 교섭으로 더욱 가까워지는 사이가 되었던 셈이다. 심지어 태조 때인 1394년 세력 간 다툼으로 쫓겨난 남산왕이 조선으로 정치적 망명을 하고, 중산왕이 송환을 요구하는 기사도 <조선왕조실록>에 보인다(조선은 송환을 거부하고 남산왕은 4년 뒤 병사했다). 또 유구 쪽으로 표류한 조선인들의 견문 기록은 드문 해외 정보들이어서 대외정책 자료로 요긴하게 쓰였다. <조선왕조실록>과 <해동제국기>에는 표류민과 유구국 사자에게 들은 유구에 대한 정보가 다수 기록돼 있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도 유구국은 외교사에 등장한다. 조선침략을 준비하던 일본은 유구와 가장 가까운 규슈 남쪽의 사쓰마번(현 가고시마)을 통해 군량미 비축과 군사적 도움을 요구했다. 그러나 유구왕은 단박에 거절하고, 왕을 책봉해준 명나라 조정에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란 정보를 흘려준다. 일본이 조선에서 쫓겨간 뒤에도 사쓰마번은 에도막부와 명나라의 화평 중재를 유구국에 요구했으나, 유구국은 다시 거부한다. 결국 사쓰마번의 무력 침공으로 오키나와 열도의 위쪽 부분을 빼앗기고 사실상 유구국은 일본에 복속된다. 이후 조선과의 공식 교류는 끊어지고, 표류민 송환만 되풀이됐다. 1770년 제주목사 이기빈은 교역하러 온 유구국 상선의 재물을 탐내어 상인들과 유구국 태자를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기빈은 훗날 유배돼 죗값을 치렀으나, 한동안 제주도 주민들은 유구국에 표류할 경우 보복을 받지 않기 위해 제주인임을 밝히지 말아야 한다는 수칙을 외우고 다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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